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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노리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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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노리오 4세는 1285년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로마 출신으로 부유한 사벨리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추기경을 거쳐 교황이 되었다. 그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촉발된 시칠리아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아라곤 왕국과 대립했고,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평화 협상을 시작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또한 몽골의 아르군 칸의 군사 협력 제안에 대해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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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노리오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교황 정보
존칭 접두사교황
이름호노리오 4세
호노리오 4세의 무덤에 있는 형상
직함로마 주교
본명자코모 사벨리
교회가톨릭 교회
임기 시작1285년 4월 2일
임기 종료1287년 4월 3일
선임 교황마르티노 4세
후임 교황니콜라오 4세
서임1285년 5월 20일
서임자라티노 말라브란카 오르시니
추기경 임명1261년 12월 17일
추기경 임명자우르바노 4세
출생일대략 1210년
출생지로마, 교황령
사망일1287년 4월 3일
사망지로마, 교황령
이전 직책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의 추기경 부제 (1261–1285)
문장
개인 정보
본명 (이탈리아어)Giacomo Savelli

2. 초기 경력

자코모 사벨리는 로마 태생으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벨리 가문 출신이다.[9] 그의 부친 루카 사벨리는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으며, 1266년 사망했다.[10] 모친은 알도브란데스키 가문의 여식이었다.[10]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샬롱앙샹파뉴 대성당에서 참사회원을 지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에 따르면, 그는 서품 전에 결혼한 마지막 교황이었다.[4] 그는 로마 귀족 사벨리 가문 출신으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우르비노 시장(1279년 사망)을, 차남은 로마 원로원 의원(1306년 사망)을 역임했다. 아내가 사망한 후 성직자가 되었다.

2. 1. 학업 및 초기 성직 활동

자코모 사벨리는 로마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벨리 가문 출신이다.[9] 그의 부친은 1266년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낸 루카 사벨리이다.[10] 모친은 알도브란데스키 가문 출신이다.[10]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샬롱쉬르마른 대성당에서 성직록과 교회 참사회 직을 맡았다. 이후 잉글랜드 노리치 교구 버튼 교회 교구장 성직록을 받았으나, 잉글랜드를 방문한 적은 없다.

1261년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추기경 부제로 임명되었고, 토스카나 교황 지사와 교황 군대 사령관을 겸했다. 사벨리 추기경은 외교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265년 7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를 포함한 세 명의 추기경을 로마로 보내 앙주의 샤를을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하게 했다. 클레멘스 4세 사후 3년간의 교황 공석기 동안, 1271년 9월 1일 비테르보에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타협"을 통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를 선출한 여섯 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로마는 정세가 불안정하여 콘클라베를 열기 어려웠다.

1274년 그레고리오 10세를 따라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 도미니코회, 프란체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카르멜회 등 네 개의 탁발 수도회 설립을 인가하였다. 1276년 7월 교황 아드리아노 5세의 명으로 다른 두 추기경과 함께 비테르보에서 독일 왕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를 만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 및 앙주의 샤를과의 관계에 대해 논의했으나, 다음 달 아드리아노 5세의 선종으로 협상은 무산되었다.

1277년 11월 사벨리는 성직자 회의 수석 부제가 되었으며, 이 직위로 1277년 12월 26일 교황 니콜라오 3세1281년 3월 23일 교황 마르티노 4세 대관식에서 교황관을 씌워주었다.

2. 2. 추기경 시절

로마의 유력 가문 사벨리 가문 출신인 자코모 사벨리는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샬롱앙샹파뉴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었다.[9][1] 이후 잉글랜드 노리치 교구 보스턴 본당 사제로 등용되었으나, 실제로 방문하지는 않았다.[9]

1261년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9] 또한 토스카나 현감과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9] 1265년 7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그를 포함한 세 명의 추기경을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에게 파견했다.[9]

교황좌가 오랫동안 공석이던 중, 1271년 9월 1일 비테르보에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여섯 명의 추기경 중 한 명으로서 타협을 통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를 선출하는데 기여했다.[9] 1274년에는 제2차 리옹 공의회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함께 참석하여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가르멜회 등 네 개의 탁발수도회 설립을 용인하였다.[9]

1276년 7월, 교황 하드리아노 5세의 지시로 두 명의 추기경과 함께 비테르보에서 독일 왕 루돌프 1세를 접대하고 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와 카를로 1세와의 관계에 대해 논의했으나, 하드리아노 5세가 선종하면서 협상은 무산되었다.[9]

1277년 11월, 사벨리는 추기경단의 부제급 추기경 단장이 되었다.[9] 그는 1277년 12월 26일 교황 니콜라오 3세1281년 3월 23일 교황 마르티노 4세의 대관식에서 교황관을 씌워주는 역할을 했다.[9]

3. 교황 선출

1285년 3월 28일 마르티노 4세가 페루자에서 선종하자, 로마 귀족 사벨리 가문 출신의 사벨리 추기경은 4월 2일 첫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호노리오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1][5] 그는 5월 19일 라티노 말라브란카 오르시니 추기경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삼위일체 대축일인 5월 20일에 주교로 축성되고 교황으로 즉위했다.[13][7]

호노리오 4세는 이미 고령이었고 통풍(또는 관절염)으로 심하게 고통받아 서 있거나 걸을 수 없었다. 미사를 드릴 때 그는 특별히 제작된 의자에 앉아야 했고, 성체 거양 때 그의 손은 기계 장치로 들어 올려야 했다.[13][7]

4. 시칠리아 갈등

호노리오 4세는 즉위 후 시칠리아 문제에 즉각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샤를 1세의 통치를 거부하고 아라곤의 페드로 3세를 왕으로 추대한 시칠리아와 페드로 3세에게 교황령 금지령을 내리고, 아라곤 왕위를 박탈하여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에게 주었다. 또한 무력을 동원해 시칠리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도왔다.[11]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교황 연합군을 격퇴하고 앙주가의 상속자 살레르노의 샤를을 사로잡았다. 1285년 1월 샤를 1세가 사망하면서 포로로 잡힌 아들 샤를이 정당한 계승자가 되었으나, 호노리오 4세는 앙주 가문에 대한 지원과 시칠리아에 대한 제재를 철회하지 않았다.

불라 호노리오 4세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인들이 앙주 가문의 샤를 1세 치하에서 겪었던 폭압적인 통치를 승인하지 않았다. 1285년 9월 17일 헌장("시칠리아 왕국의 질서에 관한 헌장")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에 기반하지 않은 정부는 번창할 수 없다고 말하며, 시칠리아 백성을 왕과 관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45개 칙령을 발표했다.

1285년 11월 페드로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왕국이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아라곤의 하이메 2세로 나뉘면서 상황이 변했다. 알폰소 3세는 아라곤 왕관을,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다. 호노리오 4세는 둘 다 인정하지 않았고, 1286년 4월 하이메 2세와 2월 팔레르모에서 그의 대관식에 참여한 주교들을 파문했다. 그러나 하이메 2세는 파문에 개의치 않고 로마 해안에 함대를 보내 토레 아스투라를 파괴했다.

시칠리아인들에게 억류되어 있던 앙주 왕위 요구자 살레르노의 샤를은 1287년 2월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하이메 2세에게 포기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유사한 합의를 금지했다.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협상을 완료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결국 1302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때 아라곤과 시칠리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4. 1. 평화 정책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알려진 1282년 3월 31일의 학살은 어떠한 화해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사 금지령을 내리고, 페드로 3세에게는 그의 아라곤 왕위를 박탈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어린 아들 발루아 백작 샤를을 아라곤의 새 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시칠리아를 무력으로 탈환하려는 카를로 1세의 시도를 도왔다.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군과 교황군의 합동 공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카를로 1세의 후계자인 살레르노의 샤를을 생포했다. 1285년 1월 6일 카를로 1세가 사망했다. 마르티노 4세보다 온건하고 평화를 바라는 성향이었던 호노리오 4세는 앙주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도, 시칠리아에 부여한 성무 금지령을 철회하지도 않았다.[11]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칠리아인들에 대한 앙주 왕가의 폭정에 대해서도 찬동하지 않았다. 이는 1285년 9월 17일 반포한 교황 헌장(Constitutio super ordinatione regni Siciliae)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헌장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에 입각해 세워지지 않은 정부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왕과 관료들로부터 시칠리아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45개의 법령을 제정하였다.[11]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인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가 각각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이 되어 왕국이 분열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이 변하였다. 호노리오 4세는 이 중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1286년 4월 11일 그는 하이메 2세와 2월 2일 팔레르모에서 그의 대관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모두 파문하였다. 하지만 하이메 2세와 주교들 모두 교황의 파문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하이메 2세는 로마 해안가에 함대를 보내고 아스투라 시에 불을 질러 파괴하기까지 했다.[11]

한편 시칠리아인들에게 여전히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앙주 가문의 살레르노의 샤를은 오랜 포로 생활에 결국 지쳐 1287년 2월 27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하이메 2세에게 양도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호노리오 4세는 이 계약이 시칠리아에 대한 교황청의 개입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무효로 선언하고 이와 유사한 어떠한 협정을 맺는 것을 금했다.[11]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의 하이메 2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처했지만,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의 관계는 좀 덜 적대적이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호노리오 4세와 알폰소 3세 간에 평화 협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1302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때에 와서야 아라곤과 시칠리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11]

4. 2. 아라곤과의 관계

호노리오 4세는 즉위 후 시칠리아 문제에 즉각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샤를 1세의 통치를 거부하고 아라곤의 페드로 3세를 왕으로 추대한 시칠리아와 페드로 3세에게 교황령 금지령을 내리고, 아라곤 왕위를 박탈하여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에게 주었다. 또한 무력을 동원해 시칠리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도왔다.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교황 연합군을 격퇴하고 앙주가의 상속자 살레르노의 샤를을 사로잡았다. 1285년 1월 샤를 1세가 사망하면서 포로로 잡힌 아들 샤를이 정당한 계승자가 되었으나, 호노리오 4세는 앙주 가문에 대한 지원과 시칠리아에 대한 제재를 철회하지 않았다.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인들이 앙주 가문의 샤를 1세 치하에서 겪었던 폭압적인 통치를 승인하지 않았다. 1285년 9월 17일 헌장("시칠리아 왕국의 질서에 관한 헌장")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에 기반하지 않은 정부는 번창할 수 없다고 말하며, 시칠리아 백성을 왕과 관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45개 칙령을 발표했다.

1285년 11월 페드로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왕국이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아라곤의 하이메 2세로 나뉘면서 상황이 변했다. 알폰소 3세는 아라곤 왕관을,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다. 호노리오 4세는 둘 다 인정하지 않았고, 1286년 4월 하이메 2세와 2월 팔레르모에서 그의 대관식에 참여한 주교들을 파문했다. 그러나 하이메 2세는 파문에 개의치 않고 로마 해안에 함대를 보내 토레 아스투라를 파괴했다.

시칠리아인들에게 억류되어 있던 앙주 왕위 요구자 살레르노의 샤를은 1287년 2월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하이메 2세에게 포기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유사한 합의를 금지했다.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협상을 완료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1302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때 아라곤과 시칠리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4. 3. 협상의 지속과 결렬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알려진 1282년 3월 31일의 학살은 어떠한 화해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사 금지령을 내리고, 페드로 3세에게는 그의 아라곤 왕위를 박탈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어린 아들 발루아 백작 샤를을 아라곤의 새 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시칠리아를 무력으로 탈환하려는 카를로 1세의 시도를 도왔다.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군과 교황군의 합동 공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카를로 1세의 후계자인 살레르노의 샤를을 생포했다. 1285년 1월 6일 카를로 1세가 사망했다. 마르티노 4세보다 온건하고 평화를 바라는 성향이었던 호노리오 4세는 앙주 왕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도, 시칠리아에 부여한 성무 금지령을 철회하지도 않았다.[1]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칠리아인들에 대한 앙주 왕가의 폭정에 대해서도 찬동하지 않았다. 이는 1285년 9월 17일 반포한 교황 헌장(Constitutio super ordinatione regni Siciliae)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헌장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에 입각해 세워지지 않은 정부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왕과 관료들로부터 시칠리아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45개의 법령을 제정하였다.[1]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인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가 각각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이 되어 왕국이 분열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이 변하였다. 호노리오 4세는 이 중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1286년 4월 11일 그는 하이메 2세와 2월 2일 팔레르모에서 그의 대관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모두 파문하였다. 하지만 하이메 2세와 주교들 모두 교황의 파문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하이메 2세는 로마 해안가에 함대를 보내고 아스투라 시에 불을 질러 파괴하기까지 했다.[1]

한편 시칠리아인들에게 여전히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앙주 가문의 살레르노의 샤를은 오랜 포로 생활에 결국 지쳐 1287년 2월 27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하이메 2세에게 양도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호노리오 4세는 이 계약이 시칠리아에 대한 교황청의 개입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무효로 선언하고 이와 유사한 어떠한 협정을 맺는 것을 금했다.[1]

호노리오 4세는 시칠리아의 하이메 2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처했지만,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의 관계는 좀 덜 적대적이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호노리오 4세와 알폰소 3세 간에 평화 협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1302년 보니파시오 8세 때에 와서야 아라곤과 시칠리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1]

5. 로마와 교황령

로마와 교황령은 호노리오 4세의 재위 기간 동안 수년간 누리지 못했던 평화를 누렸다. 그는 교황 권위에 가장 강력하고 완강하게 반대했던 몬테펠트로의 가이 백작을 굴복시켰다. 가이 백작은 수년간 교황 군대에 성공적으로 저항해 왔다. 교황의 권위는 이제 라벤나, 안코나 변경백령, 스폴레토 공국, 베르티노로 백작령, 마틸디안 영토, 펜타폴리스(리미니, 페사로, 파노, 세니갈리아, 안코나)를 포함하는 교황령 전역에서 인정받았다. 호노리오 4세는 교황 수입을 징수하기 위해 이탈리아 중북부의 거대 가문 은행을 고용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5. 1. 로마와의 관계

로마와 교황령은 호노리오 4세 치세에 지난 수년 간 누리지 못했던 평화를 구가했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여 교황군에 맞선 몬테펠트로 백작 귀도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이제 교황의 권위는 라벤나, 안코나 변경백령, 스폴레토 공국, 베르티노로 백작령, 마틸디안 영토, 펜타폴리스(리미니, 페사로, 파노, 세니갈리아, 안코나)를 포함하는 교황령 전역에서 인정받았다.[2] 호노리오 4세는 세금 징수를 위해 이탈리아 북부 및 중부의 유력한 은행 가문들을 고용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같은 로마 시민이면서 로마 원로원 의원인 판둘프의 형제였던 호노리오 4세의 선출에 크게 기뻐했다. 마르티노 4세는 로마에 들어와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방해했지만, 호노리오 4세에 대해서는 로마로 정중히 초대했다. 호노리오 4세는 교황 즉위 첫 몇 개월 동안은 바티칸 언덕에서 살았지만,[3] 1285년 가을에 아벤티노 언덕에 세운 화려한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6.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큰 위협이 되지 않자, 전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그레고리오 10세가 취한 온건한 정책을 따랐다. 독일루돌프 1세바젤의 주교 하인리히를 로마에 보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요청했다. 호노리오 4세는 루돌프 1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인츠 대주교를 임명하고 대관식 날짜를 정했으며, 투스쿨룸의 조반니 보카마차 추기경을 독일에 파견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전반적으로 교황의 간섭에 반대했으며, 뷔르츠부르크 공의회에서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이에 루돌프 1세는 교황 특사가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했다. 결국 루돌프 1세와 호노리오 4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7. 기타 업적

호노리오 4세는 1285년 12월 22일 그의 사촌인 조반니 보카마차를 유일한 추기경으로 임명했다.[14] 그의 무덤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아라챌리 성당에 있다.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에 있는 호노리오 4세의 묘

7. 1. 십자군 원정 계획

호노리오 4세는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으나, 실제 활동은 피렌체, 시에나, 피스토이아의 은행 가문들의 협조를 받아 리옹 제2차 공의회에서 시행한 십일조 징수에만 국한되었다.[14]

1285년 몽골의 지도자 아르군 칸이 호노리오 4세에게 사절과 함께 친서를 보냈다. 그가 보낸 친서의 라틴어 번역본은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 친서에서 그는 무슬림들의 땅에 대해 함께 군사 공격을 하자고 제안했다.[14]

그러나 호노리오 4세에게는 칸이 제안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다.[14]

7. 2. 학문 장려

호노리오 4세는 무슬림의 개종과 동방 정교회와의 재일치를 위해 파리 대학교에 동방 언어 학원 설립을 장려했다.[14]

파르마의 연대기 저술가인 살림베네는 호노리오 4세가 수도회의 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가 1260년 파르마에서 제라르 세가렐리가 시작한 복음적 빈곤을 포용하는 수도회인 사도 형제단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286년 3월 11일, 호노리오 4세는 사도 형제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7. 3. 수도회 지원

호노리오 4세는 두 개의 가장 큰 수도회에 많은 새로운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종종 그들을 특별 임무와 주교직에 임명했고, 종교 재판을 독점적으로 맡겼다.[14]

그는 또한 카르멜회와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들의 특권을 승인했고, 카르멜회에게는 줄무늬 수도복을 흰색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 아키텐의 기욤 10세가 설립한 수도회에 특히 헌신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4세교황 우르바노 4세로부터 이미 받은 많은 특권에 더하여, 그가 추기경이었을 때 직접 설립하고 풍부하게 기증한 알바노의 성 바울 수도원을 그들에게 선사했다.[14]

파르마의 연대기 저술가인 살림베네는 호노리오 4세가 수도회의 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가 1260년 파르마에서 제라르 세가렐리가 시작한 복음적 빈곤을 포용하는 수도회인 사도 형제단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286년 3월 11일, 호노리오 4세는 사도 형제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서를 발표했다.[14]

7. 4. 추기경 서임

1261년, 우르바노 4세는 자코모 사벨리(호노리오 4세)를 부제급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클레멘스 4세 사후 진행된 콘클라베에서 그레고리오 10세를 선출한 6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 되었다. 하드리아노 5세 재임 기간에는 로마왕루돌프 1세의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 일정을 조율했지만, 하드리아노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결정되지 못했다. 니콜라 3세와 마르티노 4세의 대관식에서는 교황관을 수여하는 역할을 맡았다.[14]

1285년 12월 22일, 호노리오 4세는 그의 사촌인 몬레알 대주교 조반니 보카마차를 유일한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8. 몽골과의 관계

1285년 몽골의 통치자 아르군은 호노리오 4세에게 사절단과 서한을 보냈으며, 그 라틴어 번역본이 바티칸에 보존되어 있다.[8] 이 서한에서 아르군은 자신의 가문이 기독교와 연관이 있음을 언급하며, 이슬람 국가에 대한 합동 군사 정복을 제안하였다.[8]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이러한 침략에 대응할 능력이 거의 없었고, 이 계획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모을 수 없었다.[8]

9. 사망

호노리오 4세는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으나 실행하지 못했고, 1285년 몽골의 지도자 아르군 칸이 제안한 군사 협력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1287년 4월 3일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산타 마리아 인 아라챌리 성당에 있다.[14]

참조

[1] 서적 "Savelli," ''Die grossen Familien Italiens'' Stuttgart 1992
[2] 서적 Il senato Romano Roma 1886
[3] 서적 Papst Honorius IV. Eine Monographie Münster 1896
[4] 서적 Absolute Monarchs London 2011
[5] 서적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Berlin 1875
[6] 논문 "Aventino pagano e cristiano. La zona di Santa Sabina e del palazzo Savelli," ''Scavi e ricerche archeologiche degli anni 1976-1979'' Pisa 1985
[7] 서적
[8] 서적
[9] 서적 "Savelli," ''Die grossen Familien Italiens'' Stuttgart 1992
[10] 서적 Papst Honorius IV. Eine Monographie Münster 1896
[11] 서적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Berlin 1875
[12] 논문 "Aventino pagano e cristiano. La zona di Santa Sabina e del palazzo Savelli," ''Scavi e ricerche archeologiche degli anni 1976-1979'' Pisa 1985
[13] 서적
[1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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